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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미 누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 흙을 털자 해 넘은 그늘일랑 안갯속에 감춰두고 밥 짓는 연기 따라 아래로 아래로 걷자 (2024.01.28) 2년 전 매일 외근을 하던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습니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카페는 외근 코스 마지막 부근에 있어 일이 조금 빨리 끝나면 여유를 부리기 좋아 애용했습니다. 동네 피아노 교습소도 겸하고 있는 카페의 이름은 "쿠미"로 복음에 기록된 말 "탈리타 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탈리타 쿰"은 예수의 모어인 아람어 문장입니다. 탈리타는 젊은이를 뜻하는 탈리아의 여성형이고 쿰은 일어서다는 뜻의 쿠미의 명령형으로 이어서 해석해 보면 "소녀야 일어나라"가 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이 말로 유대교 회당장 아야로의 딸을 소생시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이.. 2024. 1. 28.
채혈실 줄줄이 팔을 걷은 나목들은 우두커니 서른겹 나이테로 바람은 견뎠지만 눈금에 선홍으로 쓸 이력서가 뜨끔하다 (2023.01.24) 밑동에 눈이 쌓인 나무들이 열을 맞춰 줄 서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원한 느낌이 있습니다. 셔츠를 걷어 힘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팔뚝 같다고나 할까요? 문득 툭 불거진 두 개의 힘줄 사이로 커다란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습니다. 처음 이 풍경을 본 건 2년 전 일로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면접 내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질문에 모두 답변을 잘했고 면접관들도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이 확실해서 합격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런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미끄러운 눈길을 급하게.. 2024. 1. 25.
별주부전 청하지도 않았건만 머리 뉘일 돌 생겼다 자라처럼 일하다가 간담이 서늘하면 목 빼고 눈을 감출 개운죽이나 키워야지 (2024.01.07) 갑자기 보직이 바뀌어 피곤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주로 움직이는 일을 많이 했는데 새로 받은 업무는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좀이 쑤시고 눈과 목, 어깨가 많이 아팠는데 일 주 정도 되니 그나마 적응해 가는 것 같습니다. 중국 서진 사람이었던 빙익태수 손초 역시 이런 사무직의 애환을 느꼈던 것인지 수석침류(漱石枕流)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사실 수류침석(漱流枕石)을 잘못 말한 것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냇물로 양치질을 하고 돌을 베개 삼겠다 하는 것을 그만 반대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듣고 있던 친구 왕제가 이를 지적하며.. 2024. 1. 20.
청설(聽雪) & 배설(排雪) 눈으로 담으래서 눈인줄만 알았다 바람에 귀를 닫고 눈 빼고 종종 걷다 풀 낙엽 끓이는 소리에 노래도 벗어던졌다 (2023.12.30) 올해는 유독 눈이 자주 옵니다. 출근길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오르며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데 못 듣던 노이즈가 들려 걸음도 음악도 멈추어 보니 자글자글 눈 내리는 소리였습니다. 평일과는 다르게 주말 근무는 주로 자리를 지키는 일이라 짬을 내서 시조를 쓰다 길이 얼어 차들이 못 올라오고 있다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쓸 때는 나름 흡족한 시조였는데 다시 보니 왜 이리도 민망하고 보기 싫은지, 지울까 망설이다 한 수 더 부칩니다. 눈이 싫어야 어른이라는데 그래도 저는 아직 눈이 좋으니 철이 덜 든 모양입니다. 눈 쓰는 손 따로있고 시 쓰는 손 따로있나 다 같이 발.. 2024. 1. 19.
P 졸음 쉼터 500m 앞 ↗ 상투 마냥 머리 쥐고 제가 아주 상전이다 쥐처럼 쫓아내도 황소 같은 뒷걸음질 그대로 밟아버려도 좋으련만 관세음보살 (2023.12.29) 2024. 1. 18.
팥죽을 들며 동지는 고뿔이 쉽고 하지는 달 아쉬운데 해 뜨면 볕을 쬐고 달 뜨면 달 쬐라던 님 따라 정월에는 호두 부럼 깨물어볼까 (23.12.21 계묘년 동지 전야) 동지가 아직 한 달이 안 지났는데 벌써 해가 많이 길어졌습니다. 일하는 시간은 분명 똑같은데 이상하게 겨울은 퇴근하면 어두워서 그런지 하루가 다 간 것 같아 괜스레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 흠입니다. 어릴 때는 눈이 오는 겨울이나 생일이 있는 가을을 막연히 좋아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선호하는 계절도 눈처럼 녹아 해 뜨는 쪽으로 슬그머니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름이 거의 끝날 무렵 아침저녁으로 조금 선선하다 느끼는 정도가 딱 좋습니다. 쓰다 보니 또 짧은 머리에 가벼운 옷차림, 팔에 스치는 기분 좋은 바람의 촉감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막상 여름.. 2024.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