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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쿠미

by 사등 2024. 1. 28.

 

<쿠미>

누이야 이제 그만 일어나 흙을 털자
해 넘은 그늘일랑 안갯속에 감춰두고
밥 짓는 연기 따라 아래로 아래로 걷자

(2024.01.28)

 

2년 전 매일 외근을 하던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습니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이 카페는 외근 코스 마지막 부근에 있어 일이 조금 빨리 끝나면 여유를 부리기 좋아 애용했습니다. 동네 피아노 교습소도 겸하고 있는 카페의 이름은 "쿠미"로 복음에 기록된 말 "탈리타 쿰"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탈리타 쿰"은 예수의 모어인 아람어 문장입니다. 탈리타는 젊은이를 뜻하는 탈리아의 여성형이고 쿰은 일어서다는 뜻의 쿠미의 명령형으로 이어서 해석해 보면 "소녀야 일어나라"가 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이 말로 유대교 회당장 아야로의 딸을 소생시킵니다. 교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가 행한 소생의 기적으로 일반 대중에게 더 유명한 것은 아마 라자로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은 유다 지방의 마리아와 마르타라는 사람으로부터 그들의 형제인 라자로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는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며 오히려 그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가지 않습니다. 이틀이 지나서야 그는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잠들어 있는 친구 라자로를 깨우러 가겠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유다에 도착했을 때 라자로는 이미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습니다. 마리아와 마르타가 예수를 원망하자 그는 무덤으로 가 하늘에 기도하고는 라자로를 부릅니다. 그러자 정말 라자로는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예수는 사람들을 시켜 라자로의 얼굴에 덮인 수건과 손발을 묶고 있는 삼베를 풀어줍니다. 두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신앙이 없는 현대인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록이 대체로 사실이라고 했을 때, 이야기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정도로만 각색을 하자면 진상은 이러할 것입니다. 소녀와 라자로는 죽은듯한 잠에 드는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습니다. 숨은 쉬고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병, 우리에게 이 병의 이름은 너무나도 친숙합니다.

우울증과 그것이 그 희생자를 아무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지점까지 몰아붙이는 결정적인 영향에 관해, 미국 토크쇼 진행자 딕 캐빗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이 고통스런 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면, 2.5미터 떨어진 테이블 위에 치유력이 깃든 마법 지팡이가 놓여 있어도, 가서 지팡이를 집어 드는 일조차 너무도 힘듭니다." 감정이 없으면 이성도 쓸모없다는 것에 대해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은 아직 제시된 적이 없다. 우울증으로 무기력해지면, 당신의 정보 수집 체계는 정보를 수집·분석하여 이런 사실들을 당신에게 보고한다. (1) 해야 할 일이 없다. (2) 가야 할 곳이 없다. (3) 되어야 할 것이 없다. (4) 알아야 할 사람이 없다. 의미로 충만한 감정이 당신의 뇌가 곧고 좁은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유지하지 않으면, 당신은 균형을 잃고 명료함이라는 심연 속으로 추락할 것이다. 의식 있는 존재에게 명료함이란 재료 없는 칵테일, 수정처럼 맑은 혼합주로서, 당신을 현실로 인한 숙취에 시달리게 놔둘 것이다. 완벽한 지식에는 오직 완벽한 무無만이 있을 뿐이며, 당신이 삶의 의미를 원한다면 이 사실은 지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인간종에 대한 음모, 토마스 리고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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