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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채혈실

by 사등 2024. 1. 25.


<채혈실>

줄줄이 팔을 걷은 나목들은 우두커니
서른겹 나이테로 바람은 견뎠지만
눈금에 선홍으로 쓸 이력서가 뜨끔하다

(2023.01.24)

 

밑동에 눈이 쌓인 나무들이 열을 맞춰 줄 서있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시원한 느낌이 있습니다. 셔츠를 걷어 힘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팔뚝 같다고나 할까요? 문득 툭 불거진 두 개의 힘줄 사이로 커다란 주삿바늘을 찔러 넣는 느낌이 들어 소름이 돋습니다. 처음 이 풍경을 본 건 2년 전 일로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면접 내용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질문에 모두 답변을 잘했고 면접관들도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경력이 필요한 자리라는 것이 확실해서 합격은 요원해 보였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그런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미끄러운 눈길을 급하게 빌려 신은 손가락이 두 개는 더 들어가는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내려오느라 발이 조금 아팠을 뿐입니다. 집에 돌아와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바닥에 누워있는데 전화가 울립니다. 역시나 합격은 아니었지만 계약직이라도 일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에 급하게 택시를 불러 한 달음에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해 1년이 조금 안 되는 계약기간을 채우고 이듬해 다시 시험을 봤고, 지금은 또 해가 넘어가 벌써 입사 2년 차가 되었습니다. 근 3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체감되는 변화 중 하나는 건강검진입니다.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는 누구나 2년에 한 번 국가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지만 백수라면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입니다. 그러나 취직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선 회사는 합격자가 정말로 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체검사 확인서를 요구합니다. 국가건강검진은 의무가 됩니다. 여기에 국가건강검진이 없는 해에는 보통 회사에서 별도로 종합건강검진을 지원해 주기 때문에 사실상 매해 건강검진을 받게 됩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목을 보며 팔뚝에 느껴졌던 주삿바늘의 느낌은 우연히 아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왜 누가 꾸짖는 것도 아닌데 건강검진이 다가오면 그제야 건강관리를 하게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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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모네의 포플러 나무 연작을 잘라서 이어 붙인 것으로 2023년 9월 23일 꿈의숲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박판기(바순) 김성준(오보에) 양우중(피아노) 트리오의 공연 포스터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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