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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악은 존재하지 않는가: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함께 보기

by 사등 2024. 4. 20.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느릿하고 침울한 음악과 함께 하늘로 뻗어있는 숲의 나뭇가지들을 천천히 흘려보내면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시간입니다. 그다음에는 잠깐 아이의 시간을 보여준 뒤, 시골 마을의 시간으로 이동합니다. 통나무를 자르고 다시 도끼로 하나하나 패서 장작을 만들고, 계곡 물을 말통에 담아 하나하나 직접 옮기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아이들의 시간으로 돌아옵니다. 다루마상가고론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시간은 마치 멈춰있는 듯하다가 또 빠르게 지나갑니다. 자동차의 시간, 딸을 찾는 아버지의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부녀의 시간, 해가 진 촌락의 시간을 지나 이번에는 도시의 시간이 이 마을의 시간을 침범합니다. 두 시간은 점점 뒤엉켜 알 수 없게 됩니다.

시간은 시선이다

입자들의 초기상태와 가해진 힘의 방향과 크기를 알 수 있다면, 그리고 물리학이 대체로 옳다고 믿는다면, 이 입자들의 움직임은 완전히 예측 가능합니다. 여기에 우연이나 의지 같은 것이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합니다. 사건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다시말해서 세상의 모든 일들은 결정론적이며 실험적으로 재현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시간의 존재의의는 무엇일까요? 시간은 우리가 사건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인간의 뇌는 사건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뇌는 사건을 여러 단면으로 자르고 무질서도(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나열합니다. 그리고 이 나열방법이 바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일종의 사이코메트리, 엎질러진 물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컵이 떨어지는 과정을 되감기 한 후 슬로 모션으로 재생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극은 인간이 관찰자인 동시에 엎질러진 물, 사건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입자의 움직임입니다. 게다가 이 움직임은 이미 정해져 있고, 심지어 인간은 이 움직임의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서 한 가지 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데, 이러한 움직임을 완전히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결과라고 받아들입니다.

분리뇌 실험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을 제거하는 뇌량절제술은 일부 뇌전증(간질) 환자의 증상완화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말 그대로 좌뇌와 우뇌가 분리되어 있는 "분리뇌"를 갖게 되지만 일상 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뇌량을 통한 정보 교환은 불가능 하지만 감각기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위적으로 이러한 정보 공유를 불가능하게 한다면 뇌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당연히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실험을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리뇌 환자의 왼쪽 눈에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오른쪽 눈에는 닭을 보여주면서 어울리는 물건을 고르게 합니다. 환자는 왼손으로는 삽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닭발을 잡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보면 몸의 오른쪽과 언어능력을 담당하는 좌뇌는 자연스럽게 닭과 닭발의 연관성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뇌에는 언어중추가 없기 때문에 환자는 눈을 치우기 위해서 삽을 골랐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좌뇌는 우뇌를 대신해 그럴듯한 설명을 내놓는데 이런 식입니다. "닭장을 치우려면 삽이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환자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느끼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환자는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삽을 골랐고 진심으로 닭장을 치우기 위해 삽을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시간이 사건을 해석하는 인간의 방식인 것처럼 의지는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래서 어쩌라는 말인가?'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일은 결정되어 있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선과 악도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범죄자를 처벌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의지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꽃이 아름답다고 느끼고 음악과 영화를 즐기고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는 없을지 몰라도 해석의 차이를 만들 수 있고 그것이 실로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운이 나쁘게도, 혹은 운이 너무 좋게도 지나치게 명민한 이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않았다면 우리의 뇌는 언제나 이 한눈팔기에 협조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든 이것이 불가능한 사람들, 우주 끝까지 찾아와주는 아들이 있어도 우주에 인간밖에 없다는 외로움에 미쳐버리는 과학자(애드 아스트라), 인생의 불확실한 행복에 비해 존재론적 고통은 너무나도 확실하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 당장 출생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토마스 리고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어떤 것도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전도서)들을 위로할 방법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슬픈 일이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2024.04.20)